|
지난 일년간 병원과는 무관한 실험실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나니 혈액학적 악성질환의 WHO분류가 개정되어 있었다. 첫 연구년의 지도교수였던 Dr. Li가 당신이 처음 수련받던 시절에는 급성백혈병은 골수구계, 림프구계로 만 나뉘다 분류가 정말 복잡해졌다고 한 말이 기억나면서 이런 추세라면 전문의 개인이 책 찾아보며 적절한 분류와 진단이 가능했던 시기가 곧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악성질환 진단에 현미경이 필요없이 유전자 변화 만으로 진단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도 한다.
운전 중에 원고의뢰 전화를 받고 거리를 보니 이 추운 날씨에도 짧은 치마에 곱게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눈에 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 왔지만, 반세기를 살아온 후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외모는 내면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매혹적이고 균형 있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실성, 신실함, 일에 대한 몰입, 만족감, 혹은 나태, 불만, 시기, 탐욕 등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고스란히 종합되어 그 사람의 외모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골수 슬라이드를 들여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세포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말을 걸어온다. 잘 분화되어 보라색 과립이 가득하고 탐스러운 핵이 주렁주렁 연결된 거핵구가 있는가 하면 일찌감치 떨어져 나와 혼자서 조기 성숙해 버린 반항아 같은micromegakaryocyte 도 보인다. 뭉실뭉실 몸집을 키우기는 했는데 핵이 실하지 않고 퉁퉁 불은 듯한 PV의 거핵구도 있고 비뚤어진 깡패 같이 시커멓게 변한 핵으로 시시덕거리며 모여 있는 PMF 거핵구 무리도 보인다. 이런 다양한 모습들은 내부의 이상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이를 토대로 혈액학적 진단도 가능해 왔다. 하지만 이젠 굳이 형태학적 이상을 기반으로 다른 질환들을 감별진단 하지 않아도 바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특이 유전자들이 속속 발견되어 진단기준에 도입되고 있다. 유전자수준의 이상을 특정하지 못했던 기간 동안 질병진단의 일차적인 자료를 제공해왔던 형태학적인 정보들이 앞으로는 손쉽고 간편해진 유전자 검사들에 그 자리를 내어 주는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오래된 손으로 돌리는 원심분리기를 보듯 먼 훗날 박물관에 놓인 현미경을 보며 추억에 젖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누군가의 유전정보로 그 사람의 첫인상을 대신하는 시대도 올까? 숙련된 진단혈액학자가 세포 모양의 변화로 질병을 감별하듯 오랜 경험으로 사람의 외모나 관상에서 그 사람의 내면을 알아보는 맛이 없이 바로 즉각적으로 한 사람의 평가가 가능한 그런 시대 말이다. 그런 시대에는 경험이나 숙련도 보다는 순발력이나 유연함,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적응력 등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리라.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유연성을 최대한 유지하여 새로운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