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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병원이 MERS 집중치료병원으로 지정되어 환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데다가 ‘공포의’ 2주기 의료기관인증 수검마저 겹쳐 매우 고단한 시기에 기고 요청을 받고 문득 떠오른 것은 여러 해 전에 수검한 ‘검사실 신임’ 인증이었습니다. ‘인증’이라는 단어는 몇 년 전부터 털어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을 떠올립니다.
지난 십 수년 간 검사실신임 인증을 준비해 오면서 검사 업무가 체계화되고 질관리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함께 고생하여 인증을 준비하고 수검하는 과정을 통해 검사실은 단합하고 직원들의 자신감도 향상되었습니다. 저는 인증의 이런 순기능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7년 동안의 병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잠시 여유를 얻고 있던 차에 후배 교수가 장기 해외 연수를 떠나면서 과장 직을 다시 수행하게 되었고, 그 해 검사실신임인증 수검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사팀을 맞이하고 보니 저보다 선배이신 팀장님은 팀장으로서의 경험이 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팀장님의 후배 교수 한 분을 중심으로 모두 일곱 분이 오셨는데 당시 인증심사를 까다롭게 해서 여러 대형 병원들마저 1년 인증을 부여한 바 있던 소위 ‘드림팀’의 일원도 포함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상견례 시간에 팀장님께서 학회에서 ‘인증이 너무 빨리 끝나는 경향이 있으니 오후 4시까지 찬찬히 심사하라’는 지침을 받으셨다면서, 아주 철저히 심사할 테니 2년 인증은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뉘앙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는 시작부터 시쳇말로 ‘완전히 쫄아’ 버렸습니다.
게다가 진단혈액 심사위원은 12시에 본인이 속한 전문학회 이사회에 참석한다고 심사를 중단하고 10시쯤 자리를 떴습니다. 어차피 4시는 되어야 심사가 끝날 테니 오후 2시에 다시 와서 재개하겠다고 했습니다. 인증 수검 외에도 할 일이 많았던 진단혈액 검사실 직원의 표정이 급히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분자진단검사 심사위원이 ‘왜 HLA 검사를 하면서 HLA 분야 인증 신청을 하지 않았느냐’는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아예 인증 전체가 무효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제대혈은행 직원이 장소 문제로 기기를 검사실에 가져다 놓고 저장 제대혈의 HLA 검사를 하던 것이고 환자 대상의 HLA 검사는 전혀 시행한 적이 없었던 터라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옥신각신 끝에 심사는 겨우 재개되었지만 여러 모로 분위기는 어수선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단혈액을 제외한 분야의 인증 심사는 12시를 전후하여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오전에 떠났던 위원이 복귀하여 오후 2시부터 진단혈액 심사가 재개되었고 3시 반이 넘어 끝났습니다. 그 사이에 분자진단검사 심사위원은 간다는 인사도 없이 떠났고, 팀장과 나머지 심사위원들 및 참관 전공의들은 회의실에서 저와 함께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원들의 표정은 대부분 울상이 되었고 과장인 저로서는 직원들 사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팀장님에게 이런 경우는 옳지 않음을 ‘감정을 섞어’ 강하게 어필하였습니다. 평소 보기 어려운 제 모습에 직원들조차 모두 놀랐고, 그렇게 4시 넘어 심사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떠나고 진단혈액 검사실의 직원이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전체 회식을 했는데 거기서도 한번 더 울음이 터졌습니다. 오전에 심사가 마무리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는데 결국 오후에도 늦도록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는 게 참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검사실신임 인증은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근본적으로 동료간의 리뷰라서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주고 서로 배우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지고 열심히 검사실을 운영해 왔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져서 저나 직원들에게 상처가 되었었고, 그 당시에는 진단혈액학 분자진단 검사 심사위원이었던 두 분에 대해서도 썩 좋은 감정을 갖기는 어려웠습니다. 둘 다 저랑 비슷한 연배라 더욱 그랬습니다. 학회에서 보면 어색할 수 있겠다 싶었고 사실 지금도 저는 좀 그렇습니다.
인증 심사위원이 ‘갑’이 아니어야 함을 이제는 학회원 누구나 아실 테지만, 적어도 그 때는 분명히 ‘갑’이었고 저희는 ‘을’이었습니다. 동업자의 직장에서 서로 다른 업무 스타일을 평가할 때는 서로 존중해야 하고 겸손함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증심사에 참여하면 늘 긍정적인 면을 보고 배워 오려고 노력합니다. 제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이야 말로 가장 큰 적입니다. 당시 ‘큰 병원들이 우후죽순 1년 인증밖에 못 받는데 너희처럼 작은 병원이야 두말하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몇 년이 되도록 가슴 속에 안타까움이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어렵게 시간 내서 와 주신 분들에게 저도 너무 큰 결례를 했기 때문에 먼저 다가가기에는 쑥스러운 일이 되었고 그 분들도 제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을 터라 무심하게 몇 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서로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너무 열정적이다 보니 벌어진 일이니, 저나 그 분들이나 그저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서로 연락이나 하고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학회원들끼리 이렇게 지내는 건 정말 피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올해 전공의 수련실태 심사를 위해 두 위원 중 한 분이 근무중인 병원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기회를 빙자해서 적어도 한 분과는 훌훌 털어 버리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사실 저는 그 교수님을 좋아합니다. 항상 학회와 학회원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저도 존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당연히 제가 먼저 사과할 생각입니다. 그 분이 흔쾌히 받아 주면 좋겠습니다.
이전 테마스토리 내용을 참고하려고 진단혈액학회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둘러 보니 밀린 회비가 꽤 있었습니다. 한꺼번에 결제하고 보니 홈페이지 최초 버전을 만들고 도메인 네임을 정한 것도 저인데 병원 일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학회에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학회원들은 더욱 존중해야겠습니다.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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